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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5 김이천교수_한국미술사 속의 미술품 생산과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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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5 김이천교수_한국미술사 특강

한국미술사 속의 미술품 생산과 향유 김이천 (미술평론가)

1. 미술의 창작과 향유

미술은 인간 행위의 산물이다. 무엇을 장식하거나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 이미지(image)가 곧 미술이다.

이미지 생산자, 즉 미술가는 누군가를 위해서나 이미지를 만든다. 원시인들은 사냥을 떠나기 전 들짐승을 죽이는 그림을 바위에 시각화하면서 안전하고 풍족한 사냥을 기원했다. 알타미라나 라스코 동굴 벽화가 그렇고, 반구대의 암각화가 그렇다.

이들 선사시대의 미술은 특권층이 아닌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예술이고, 이를 창작과 소비한 사람은 오늘날의 프로슈머(prosumer, 生費者)처럼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동시에 한 대중예술이었다.

이때의 터질 듯이 풍만한 이미지(미술)는 대중의 생존을 위한 다산(多産)과 풍요(豐饒)를 상징하고, 발기한 채 뻗은 남자는 신과 교신하여 공동체의 염원을 이루는 셔먼(Shaman)이다.

샤먼처럼 초자연적 힘으로 소망을 이루고자 했던 원시미술은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 장희빈이 짚으로 만든 제웅[草俑]에 작게 만든 숙종비 인형왕후의 옷을 입혀서 활을 쏘아댄 일이나 오늘날에도 개업 같은 대사에 죽은 돼지머리를 향해 엎드려 절하는 일과 같은 절박한 소망의 표현이었다. 원시의 프로슈머가 즐긴 이미지는 부적(符籍) 같은 영험한 존재였다.

이러한 소망 표현은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민화(民畵)에서도 이루어졌고, 개성이 생명인 현대미술에서도 작가의 ‘의도(idea)’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의 소망이나 마음을 담은 미술은 일반 상품처럼 생산되고 소비된다. 화실(아틀리에 또는 스튜디오)은 공장, 화랑이나 경매장은 시장과도 같다. 미술가가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의도[idea]만 있으면 미술이 된다는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궤변 같은 혁명에 힘입어 상업미술가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그의 작업실을 노골적으로 ‘공장(factory)’이라 부르면서 수많은 이미지들을 대량으로 복제해 유통시켰다. 그런 그가 현대미술을 대표한다니 아이러닉하기만 하다.

역사에 기록된 세계 최초의 미술가는 고대 이집트의 임호테프(Imhotep, BC2650~BC2600)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만든 건축가 겸 조각가, 화가, 의사로서 죽은 뒤 신으로 추앙된 만능천재였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사자(死者)의 영원한 행복을 수호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자를 위해 그려졌다. 벽화처럼 무덤 안에 놓인 부장품 또한 사자의 명복을 기원한다.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 같은 사람이나 동물 조각품은 그 원형의 순장(殉葬)을 대신한 부장품이고, 그 밖의 장신구나 그릇 같은 생필품 또한 사자의 영원한 삶을 지원하는 부장품이다. 골동상가에서 판매되는 고대사회의 토기나 도기 또한 대부분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런 까닭에 일부 고고학자들은 고미술상가를 문화재 훼손의 온상으로 여긴다. 문화재는 만들어진 지 50년 이상 물건을 말하는데, 서예·회화·조각·공예·건축 등의 미술품도 포함된다.

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가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사라아(因斯羅我)다.

463년(개로왕 9)에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하면서 아스카[飛鳥] 문화의 토대를 만들었던 백제의 화공(畫工)이다.

당시 일본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건너간 도공(陶工)·화공·가죽제품공 등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베(部)’라는 무리에 속하여 있었다. 인사라아도 ‘가베(畫部)’에 속했으며, 그의 자손들은 604년 가와치화사(河內畫師)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보호를 받으며 세습화공(世襲畫工)이 되었다.

백제의 위덕왕 아들 아좌태자(阿佐太子, 572~645)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이코 황제를 섭정했던 권력자 쇼토쿠태자(聖徳太子, 574~ 622)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오경(五經)과 채화(彩畵)에 뛰어났던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 579~631)은 6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호류지[法隆寺]의 금당 벽화를 그리고 제지술을 전해주었다. 호류지에 있는 일본국보1호 <백제관음상>과 2천563마리의 비단벌레 날개로 만든 <옥충주자(玉蟲廚子)>(650)는 백제 왕실에서 스이코 천황의 모친 견염원에게 선물한 불감(佛龕)이다. 622년에 사망한 쇼토쿠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곳에 안치한 <천수장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은 삼국의 미술이 강하에 영향을 끼친 세계 최고(最古)의 자수 작품이다.

이렇듯 일본의 고대미술은 한국 미술가의 활약으로 꽃을 피웠다. 인사라아와 담징 이외에 고구려의 가서일(加西溢)·자마려(子麻呂), 백제의 백가(白加) 등도 일본에서 활약했다.

신라는 651년 채전(彩典)을 두어 왕실의 장식 및 사건 기록을 담당케 했다.

통일신라의 재상 김대성(金大城, 700~774)은 751년에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수도 경주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다. 이 시기(754~755)에 의본(義本)·정득(丁得)·두오(豆烏)·광득(光得) 등이 만든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화다. 이밖에 솔거(率居)․정화(靖和)․홍계(弘繼)․김충의(金忠義) 등이 통일신라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솔거는 경주 황룡사 벽화 <노송도>와 함께 분황사에 관음보살도, 진주 단속사에 유마상을 남겼다.

김충의는 당나라의 장언원(張彦遠)이 지은 <역대명화기>에 “장군으로 덕종조(德宗朝, 779∼804)에 활약하였으며, 그림은 정교하나 격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발해(771~926)에는 송석(松石) 및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는 대간지(大簡之)와 중국 산수화의 원류인 <유춘도(遊春圖>를 그린 전자건(展子虔, 533~603)의 활동도 주목된다.

신라의 호족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는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아 이전 시대보다 혁신적인 불교미술과 청자를 만들어냈다. 고려는 신라의 채전(彩典)과 같은 왕립 도화원(圖畫院)을 두어 왕실의 장식과 역사 기록의 시각화를 맡겼다. 원나라의 침공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1270년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여 120년간 고품격의 불화와 청자를 남겼다.

고려불화는 현재 160여 점만 남아 있는데, 대부분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 있다. 혜허(慧虛)는 1300년경에 <수월관음도>, 김우문(金祐文)은 1310년에 <양류관음도>, 서구방(徐九方)은 1323년에<양류관음도>를 그렸다. 전문가답게 빼어난 구성과 채색 솜씨를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이들 불화 외에 고려 때 제왕(諸王)․공신(功臣)․사대부(士大夫)의 초상화와 함께 인물, 초상, 산수, 영모, 화조, 묵죽, 묵매 등 매우 다양한 소재의 그림들이 제작되었다.

고려 최고의 거장인 이녕(李寧)은 1124년에 사신 이자덕을 따라 북송에 갔다가 서화가인 휘종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휘종의 지시로 왕가훈·진덕지 등 북송의 한림도화원 화원에게 그림을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그린 <예성강도>가 휘종에게 칭송되거나 그의 <천수사남문도>가 중국의 명작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중국에서 유명했다.

또한 이녕이 그린 <금강산도>, <진양산수도>, <송도팔경도> 등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는 조선 후기에 정선(鄭敾)을 통해 진경산수화를 꽃피는 자양분이 되었다.

이녕의 아들 이광필(李光弼, 1132~1191) 또한 고려 최고의 화가로서 <소상팔경도>를 남겼으며, 최사훈(崔思訓)·정홍진(鄭鴻進) 등의 화가들도 <고려사>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천산대렵도>와 <노국대장부인> 등을 그렸고,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1314년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원나라의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와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미술을 발전시켰다.

고려는 통일신라 때 중국에서 수입해온 청자를 토대로 순청자를 만들어냈고, 이어 고려 후기에 독창적인 상감(象嵌) 청자를 만들어냈다. 이를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본 뒤 그의 저서 <고려도경>(1123)을 통하여 “그릇 색의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翡色)이라 부른다. 근래에 들어 그 제작이 더욱 정교해지고 색이 더욱 좋아졌다.”며 청자를 상찬하였다. 이들 청자는 대부분 왕실에서 사용하였으며, 왕족 사후 대부분 무덤에 부장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묘에서 발견된 <순화4년명 항아리>는 바닥면에 993년 향기장(享器匠)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묘에서 발견된 왕건의 누드 조각상은 제례용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건국한 뒤 고려의 도화원을 계승하여 왕실의 미술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1469년에 개명한 도화서는 예조의 종6품 아문(衙門)으로서 제조 1명과 별제 2명, 그리고 화원(畵員) 2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화원 중 종6품인 선화(善畵) 1명, 종7품인 선회(善繪) 1명, 종8품인 화사(畵史) 1명, 종9품인 회사(繪史) 2명 등 5명이 녹봉을 받고, 그 외 3명이 월급을 받았을 뿐 나머지는 수입 한 푼 없는 화학생도(畵學生徒)였다. 화원은 국가 행사의 기록화인 의궤도(儀軌圖)나 어진(御眞), 정부 간행물의 삽화, 도자기의 문양, 궁궐의 단청(丹靑), 여러 가지의 지도(地圖),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사행도(使行圖) 등을 그렸다.

이 외에도 임금이나 사대부들의 요청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독창적인 그림보다는 수요자의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려 작품은 보수적이었다.

화원은 대나무, 산수, 인물과 영모(翎毛), 화훼(花卉) 등의 4등급 화제에서 두 가지를 선택해 시험을 치러 뽑았다. 대나무와 산수가 다른 장르에 비해 점수가 높은 것은 작품의 난이도보다 국가를 뒷받침하는 유교(儒敎)를 숭상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도화서는 조선시대 말 순종 때인 1896년까지 존속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특히 그림에 대한 수요가 많아 그 인원과 규정이 달라졌다.

흔히들 조선의 대표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를 꼽는데, 삼원(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오원 장승업)은 모두 화원 출신이고, 삼재(겸재 정선․관아재 조영석․현재 심사정)는 모두 문인사대부 출신이다.

이러한 신분에 따른 구분은 중국 명나라의 문인화가 동기창(董其昌,1555∼1636) 등이 동양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한 것과 유사하다.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王維, 699~759)는 문인화가로 안녹산 난을 전후로 관리를 지낸 뒤 망천에 별장을 짓고 산수시화(山水詩畫)를 즐겼다.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 1037~1101)이 "왕유의 시를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왕유는 후대의 문인들에게 인기였다.

반면에 북종화의 시조인 이사훈(李思訓, 651~716)은 당나라 황족 출신의 화가로 측천무후의 당나라 황족 박해를 피해 숨어살면서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필치로 산수를 그렸다. 이후 북종화는 궁중 장식이나 국가 기록을 위한 그림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화려하고 세밀하게 그린 고려의 불화나 조선의 궁중화는 도화원 및 도화서 소속의 천재 화원이 제작한 걸작들이다.

화원은 궁중화 이외에도 사대부가 주문한 그림을 그렸다.

조선 초기(1392~1428)의 최대 거장인 안견(安堅)의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도원을 여행한 꿈을 3일 만에 그렸다. 이 <몽유도원도>의 좌우에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신숙주·정인지·박팽년·성삼문 등의 당대 20여 명의 친필 찬문이 적혀 있다. 이 안견의 화풍은 16세기 전반에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비롯한 일부 사대부화가들과 그 밖의 많은 화원들이 추종했다.

문인화가 강희안(1419~1464)은 북종화풍을 수용하여 <고사관수도>와 같은 문기(文氣)에 넘치는 화풍을 이룩하였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발문을 썼던 신숙주의 제수 설씨부인(薛氏夫人, 1429∼1508)은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로 알려진

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1551)보다 70여 년 앞서 활동했던 여성화가로 1482년에 순창 광덕산의 강천사의 모습을 그린 채색화 <강천사도>(보물 728호)를 남겼다.

조선중기(1550~1700)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2), 정묘호란(1627) 등 대란이 잇달고, 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대였으나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김시(金視),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이정근(李正根), 이흥효(李興孝), 이징(李澄), 이암(李巖), 김식(金埴), 조속(趙涑), 이정(李霆), 변상벽(卞相壁), 어몽룡(魚夢龍), 황집중(黃執中)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특히 이 시기에 안견파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다. 또, 조선왕조적 정취를 짙에 풍겨주는 영모나 화조화가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1700~1850)는 가장 조선적이고도 민족적인 화풍들이 풍미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으며, 영․정조 때(1724~1800)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크게 대두된 실학(實學)의 영향으로 한반도의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정선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등에 의해 풍미하였고, 강세황((姜世晃), 김두량(金斗梁), 이희영(李喜英), 박제가(朴齋家) 등이 서양화법(西洋畵法)을 추구하였다.

1769년 실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쓴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당시 양반의 집집마다 미인도가 걸려 있었다. 이때는 미인도의 달인 신윤복(申潤福, 1758~?)이 활동하지 않았던 때다. 아마도 신윤복보다 앞서 미인도를 그렸던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영향으로 미인도 장식이 유행하지 않았나 싶다. <이재난고>에는 문인화가 유덕장(1675~1756)의 <설죽도> 당시 6전, 홍득원의 <매화8폭병풍> 1냥(10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 값은 300냥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와집 1채가 100냥이었다.

조선 말기(1850~1910)에는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더욱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김정희(金正喜6)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희룡(趙熙龍) 등 추사파와 윤제홍(尹濟弘), 김수철(金秀哲), 홍세섭(洪世燮) 등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귀착된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놓는데 기여했다면 윤재홍과 홍세섭 등은 이를 토대로 세련된 현대적 감각의 이색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 시대의 회화는 중국 청대 후반기 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8세기 조선 후기 회화의 전통을 이어 전시대에 못지않게 뚜렷한 성격의 화풍을 형성하면서 근대회화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기운이 다하는 시기와 맞물려 미술계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그런 가운데 장승업(張承業)이 인물, 산수, 기명(器皿) 등 다양한 화제를 능란하게 다루어 화명을 떨치면서 후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 근대 한국화의 자양분이 되었다. 기이한 형태와 강렬한 필묵법과 설채법이 특징인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등이 계승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2. 미술품의 수장과 향유

예술은 향유됨으로써 완성된다.

그 완성자는 물론 작품의 감상자나 수집가(컬렉터)다. 대부분 권력자이거나 갑부들이 미술품을 소장하고 향유했다.

조선초기의 최대 미술품 소장자는 1447년 화원 안견에(安堅)게 자신의 꿈을 그려달라고 부탁해 <몽유도원도>(1447)를 얻었던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아우인 그는 시와 그림, 글씨에 조예가 깊었고, 중국 송·원대의 회화 수십 점과 조선초기의 안견 작품을 다수 수장했다. 그가 17세 때인 1435년부터 1445년까지 소장한 미술품의 목록은 신숙주의 <보한재집> ‘화기(畫記)’에 수록되어 있는데, 산수화 84축, 조수초목화 76축, 누각인물화 29축, 글씨 33축 등 도합 222축으로 대부분 중국의 역대 명화이고, 한국 작품으로는 안견의 그림이 유일하다. <화가>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다.

성종(成宗. 1457~1494)과 그의 아들 연산군은 도화서 화원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그림을 즐긴 왕이었다. 성종은 궁궐 안에서 화원들을 시켜 꽃과 새 등의 초목금수를 그리도록 해서 신하들이 “귀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마음이 쏠리면 자신의 뜻을 잃는다” (玩物喪志)며 성종의 서화취미를 간섭하자 도화서를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이 그림을 너무 그려 염려스럽다는 신하들의 글이 그의 나이 18세(성종6)부터 집권 말기인 37세(성종24)까지 계속해서 나온다.

성종의 아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그림감상 뿐 아니라 여색을 좋아해 그 취향을 화원을 시켜 그리도록 했다. “기생을 데리고 동산에 가는 것 같은 그림이 제일 그리기 어렵다”면서 화원들에게 사안(謝安)이 기생을 데리고 동산에 오른 중국의 고사를 그린 <동산휴기도(東山携妓圖)>를 그리게 하고, 화원들의 그림을 평가해서 직위에 반영했다.

숙종(肅宗, 1661~1720)은 후궁 장희빈을 사랑하여 내쫓았던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궁중 법도에 종친이나 외척 아니면 외간 남자가 중전 출입이 불가했다. 인현왕후를 초상화를 그릴 여성 화원이나 종친이 없어서 그림 잘 그리는 처남 김진규에게 초상화를 부탁했으나, 인현왕후 민씨에게 자신은 외정(外庭)의 신하에 불과하고 선비는 기예로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며 거절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조(正祖, 1752~1800)는 궁궐 안에서 일하며 왕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1784년 11월 창덕궁 규장각 안에 설치한 차비대령화원 직제를 신설했다. 할아버지 영조 때 임시로 만들어진 이 조직을 그전보다 2배 많은 10명으로 확대하고 왕정 핵심 기구인 규장각 산하의 정식 직제로 두고, 화원들에게 도화서 소속의 화원보다 녹봉 등에서 특별 우대를 했으며, 차비대령화원 녹취재에 참관해 출제와 채점하고 그림마다 품평했다.

정조는 속화와 책거리 같은 문방 그림을 화원 시험인 녹취재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다. 도화서의 시험은 전통적으로 대나무, 산수, 영모, 화조였다. 고종 때인 1881년까지 유지된 차비대령화원으로 김홍도·이인문·이명기·신한평·김응환·김덕성·김득신·장한종 등이 종사했다. 이들이 그린 책거리 그림, 채색화 등 민간 미술시장 유행의 전원지가 되었다.

차비대령 화원인 이인문·김득신·장한종·최득헌·이명규·윤석근·허식 등이 합작한 <화성능행도병>은 서양화의 투시법이 적극 활용되어 정교하면서도 장대하다,

김홍도·이명기 등이 참여했던 경기도 화성 용주사의 <삼세여래체탱>은 서양화의 명암법이 적용되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두 사람을 동지사행에 포함시켜 청나라의 사찰이나 연경의 천주당 성화를 견문하도록 했다. 정조가 김홍도에게 화려한 일본화를 모사케 했고, 중국을 통해 건너온 사양화풍도 적극 수용한 결과다.

조선후기의 시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진경산수를 창시한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그는 금강산 등 팔도의 명승을 정선과 함께 돌면서 시를 지어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정선에게 그려달라고 청하곤 했다. 또한 선비 문인들의 아회(雅會)에 정선을 초청해 선비들에게 소개하고 아회의 멋진 풍경을 그리도록 했으며, 정선의 작품을 구입하여 주변의 선비나 미술 애호가들에게 보여주곤 매매하기도 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가 된 정선은 1751년 비가 내리다 그친 어느 여름 날, 이병연의 도움에 대한 감사와 함께 회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에 담았다. 정선은 스승 김창흡과 친구 이병연 등의 도움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매일같이 밀려오는 주문에 시달린 정선은 휘쇄필법(揮灑筆法)과 권필(倦筆)로 그림을 그렸다. 휘쇄필법은 한 번에 쓸어내리듯 급히 휘두른 필묵법을 말한다. 18세기 이규상은 “그림 요구에 응하여 종이와 비단에 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썼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4대 민의원이었던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되찾아온 문화재 파수꾼이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중국에서 많은 책들을 구해단 준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5~1866)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낸 수묵화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상적이 죽은 뒤 여러 수장가의 손을 거쳐 일본의 추사 연구가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의 손에 넘어 가버렸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4년, 그 <세한도>가 일본으로 돌 건너간 소식을 전해들은 손재형이 거금을 들고 일본 도쿄로 넘어가 생면부지의 일본인에게 몇 달 동안 머리를 조아린 끝에 감동한 소장자에게 이 그림을 받아올 수 있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자의 집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18~19세기 고동서화 수집과 완상 취미의 열기가 문화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화가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호산외기(壺山外記)> 가운데 ‘김홍도전’에는 18세기에 김홍도가 3000전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2000전으로 매화 화분을 사고, 800전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매화 술자리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8세기 수집 열기, 특히 고동서화의 수집 열기는 주문생산으로 이어졌다. 18세기 미술계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주문에 의한 창작(생산)이다. 당시 주문자이자 후원자는 권세, 경제력, 문화감식 능력을 지닌 양반이었다. 고화서화의 수집 열기는 주문생산으로 이어져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북돋아주었고, 감식안과 비평능력을 지닌 컬렉터들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수준 또한 높아졌다.

컬렉터들이 후원자 (패트론) 겸 비평가 역할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김홍도와 정선 같은 걸출한 화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중인 출신의 화가 전기(田琦, 1825~1854)는 한양의 수송동에 이초당(二草堂)이라는 약포를 운영하면서 이곳을 화랑처럼 운영했다, 전기는 여기서 당대의 인기 화가 김수철(金秀哲)의 그림을 거래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10년간의 섭정(1863~1873)에서 물러난 뒤 1876년 그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은거하며 많은 묵란도를 그렸고, 운현궁에 노안당을 전시장으로 꾸며 매화루(賣畫樓)라는 현판을 달아 그림을 직접 그려서 팔았다. 그의 묵란도는 인기가 높아 가짜가 많이 나돌았다.

19세기의 미술시장은 문인화, 중국화, 속화, 골동품마다 나름의 수요층을 형성해 폭넓게 유통되었다. 거래가 활발해져 고동서화를 판매하는 전문 점포까지 생겨났다. 가게들은 17세기 후반 지금의 청계천 광교와 수표교 부근에 등장하기 시작해 18세기 후반 무렵에 번성해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국내 미술품은 물론 중국 청나라 북경의 고동서화 거리인 유리창에서 구입해온 중국의 고동서화도 광교 일대에서 많이 거래되었다. 광교와 수표가 일대가 18~19세기 미술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18세기 후반 강세황(1713~1791)의 손자인 강이천(姜彝天, 1769~1801)은 그의 저서 <한경사>에서 “한낮 광통교 기둥에 울긋불긋 걸렸으니 여러 폭 비단으로 길게 병풍을 칠 만하네, 근래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 고수들의 작품이니. 많이들 좋아하는 속화는 살아 있는 듯 묘하도다. 日中橋柱丹靑 累幅長絹可帳屛 最有近來高院手 多耽俗畫妙如生.” 청계천 서화포에서 주로 판매된 그림은 속화, 민화풍의 장식화 병풍이 주류였다. 당시 사대부 양반층이나 일부 부유한 중인층이 미술 가래의 중심이었지만, 광교 일대에서 민화 등이 유통되어 미술품 거래와 수집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확산된 듯하다. 강이천은 주문모 신부와 연루된 천주교 관련자로 밝혀져 문초를 받던 중 옥사했다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중국 사행 때 약재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의관이다. 김광국의 수장품은 서양화와 일본화도 포함된 다국적 컬렉션이다. 안견·강희안·이정·정선·조영석·이광사·심사정·김응환·최북·김명국·강세황 등의 그림이 모두 그가 수장한 작품이다. 김광국이 사신을 따라 중국을 두 차례 다녀온 여행이 국제적 컬렉션에 영향을 줬다. 김광국은 포졸당(抱拙堂)을 지어 자신의 소장품을 보관했으며, <석농화원(石農畫苑)>이라는 화첩에 자신의 소장품을 수록하여 신숙주의 <보한재집> ‘화기’처럼 그림마다 짧은 평문을 달았다. 서양화 <술타니에 풍경>에 “서양화법은 당나라도 송나라도 아닌 그 자체로 별체이다. 작은 화폭에 능히 천리의 먼 경치를 담고, 그 새김 기법 또한 신묘하고 정교하여 비교할 게 없다. 한 폭 수장하여 일격(一格)을 갖춘다.” 이인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낙타를 <석농화원>에 실린 김부귀의 <낙타도>를 보고 그렸다. 김부귀는 18세기에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 화가다, 건륭제 때 궁중의 화사로 일했다. 김광국인 이 그림의 제평에서 1776년에 연경에 가서 처음 낙타를 보았다고 썼다.

윤두서의 풍속화 <석공>도 이 화첩에 수록하면서 “이 석공 공석도는 공재 그린 것으로 세상에 말하는 소위 속화이다. 자못 형사(形寫)를 얻었으나 관아재에게 비한다면 오히려 한 수 아래라 하겠다.”고 평했다. 정조 때의 대문장가인 유한준(1732~1811)은 김광국의 <석농화원> 발문에서 “(그림을)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진정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소장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저 모으는 사람과는 다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당시 정선과 윤두서 등의 인기작가 그림은 300냥까지 매겨졌다. 남산 기슭의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김광국은 10대 후반부터 60대초까지 시기별로 그림을 모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그림은 73점뿐이다.

18세기에 청나라에 귀화한 조선인 안기(安奇, 1683~1746)는 중국의 유명 서화를 소장한 컬렉터였다. 소금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고개지의 <여사잠도권> <낙신부도권>, 한간의 <조야백도권>, 염립본의 <직공도>, 전자건의 <유춘도>, 하규의 <산수권>,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조맹부의 <고목죽석도>, 구영의 <채련도권> 등 중국 서화사에 획을 긋는 명작의 구입에 사용했다. 그러나 1746년 안기 집안의 갑작스런 몰락으로 이 소장품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의 소장품 가운데 수나라에서 활동했던 발해인 전자건(展子虔)의 <유춘도>가 있는데, 안기는 이 그림에 대한 평을 다음과 같이 썼다.

“비단 위에 그렸다. 높이는 약 40cm, 길이는 약 80.5cm. 짙은 청록색으로 그렸고 인물은 1.7cm가 조금 넘는다, 둥글고 낮은 산에는 나무와 돌이 있는데, 모두 텅 비어 굽어져 있고 준법이 없다. … 그림 가운데 말을 타고 노는 자가 넷, 그중 한 명은 활을 쏘는 자이다. 호수 가운데 배 한 척이 있고 여자 셋이 탔는데 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었다.”

고개지((顧愷之, 약 344~406))의 <여사잠도권>(349.5x25cm)은 중국에서 종이나 비단에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본래 북송의 휘종이 소장했으나 북송을 점령한 금나라를 거쳐 원나라 황실로 소장자가 바뀌었다. 이어 명나라 최고의 컬렉터인 항원변, 청대에는 왕성한 수장활동을 했던 건륭 황제가 소장했던 중국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청나라 말기인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난의 진압 명분으로 북경에 쳐들어온 연합군 영국군에게 빼앗겨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사잠도권>은 진나라 혜재의 비인 가씨 일족의 세도를 염려해 장화(張華)라는 문인이 쓴 <여사잠(女史簪)>이라는 글을 두루마리 형태로 도해한 그림이다. 여사잠은 투기를 멀리하고, 자손을 많이 낳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서 여인이 거울을 보며 마음을 수양하고 있다.

오세창(吳世昌, 1864~1879)은 언론인이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마구잡이로 유출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재를 털어 1천여 점이 넘는 서화를 사 모았던 민족문화 지킴이다. 그는 김정희의 제자인 이상적에게 글을 배운 부친 오경석의 영향으로 골동서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1915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에는 “(오세창이) 10여 년 이래로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음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하였데, 그중 1125점은 글씨요, 105점은 그림이다.”고 기록했다. 오세창이 평생 모은 미술품은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근역인수> 같은 서첩과 서화첩, 인장첩으로 엮어졌다. 그중 <근역화휘>는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을 비롯해 고려말 이래 우리나라 화가 191명의 그림 251점을 수록했다. 1928년에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서화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을 발간했다.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의 작품과 생애를 다루었다.

오세창의 애국적 서화수집 활동은 사회적으로 감동을 일으켰다. 10만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골동서화를 수집하도록 만든 이가 그였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산골짜기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아호 '간송(澗松)'을 지어 주면서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24세 때 부모에게 상속받은 논 800만 평(현시가 6천억 원) 대부분을 삼국시대부터 조선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서화 조각과 공예, 조형미술 등 모든 분야의 유산을 수집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일본에 사는 영국 출신 변호사 가스비의 수집품 20점을 기와집 400채, 요즘 서울 아파트 최소 시세로 1,20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불하며 사들였다. 고려시대 원숭이 어미가 새끼를 안고 있는 모양의 <청자 모자 원숭이 모양 연적>,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미인도>와 <혜원풍속도>,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까지 일제에 넘어갈 뻔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논을 팔아가면서 지켜냈다. 이들 소장품은 간송미술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 손영옥, 조선의 서화수집가들, 글항아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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